■  시간과 땅속의 공동성
  | 김광현

우리는 건축을오랫동안이런식으로말해왔다. 건축은공간을만드는일이며, 건축속에만일리가있는공간과형태를만드는일이라고.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우리는 주저없이 외관이 대단히 아름답다든가, 공간이 훌륭하다든가 하는 것으로 건축의 질을 판단해 왔다.
그리고 이 점에만 집중하여 자신의 건축을 설명해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생각은 사는 사람이 이 집을 왜 지었으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고, 또어떤시간을보낼 것인가 하 는물음과는 전혀 다른것이다. 아니, 다른것이 될가능성이 너무많다. 물론 건물이라는 것은 벽이나 지붕이나 바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건물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집은 그렇게 지음으로써 완성되고, 살고 사용할 사람에게 넘겨지며, 많은 사람들이 쓰고 어루만진다. 그런데도 건축가는 이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않는다. 건축가가 지나 치게 오브제로서의 건축물에집착하고, 건축가만의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기때문이다.

건축가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건축가는 집을 짓는데 땅을 사지도않으며 경비를 대거나 재료도 제공하지않고, 집을 짓는 실제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그곳에 살지도 않을 뿐아니라 집이 지어지고나면그집을 지나는동네사람만큼도 자주보게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건축가는 왜 그렇게 공간적 효과와 미학적 설명과 작품인 조형물에 집착하고 가슴에 담아두는것일까?
집을 짓다보면 이상한일이 두가지있다. 하나는 건축가가 가장 건축가다울때는 다른때가 아니라 설계를 의뢰받아 집이지어질땅을 건축주와 함께 찾아갈때 라는점이다. 또벽과 지붕도 다만들어져서 이제사람이 들어가 살게되었다고 기뻐하는 준공식날에 건축가는 가장건축가답게 보인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건축가는 이 두 날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건물을 만드는 모든과정이 건축가의 존재이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실에 주목하면 건축가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알수있다.

건축가는 이두날 사이에서 땅과 집을 마음대로 드나든다. 이기간은 물질을 모아 배열하고 공간도 만들며 기술을 구사하도록 위임받은 기간이다. 그러나 준공하고나서 사람이 들어가 살기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건축가는 사진을 찍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방문하고 싶어도 건축주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 그는 그곳에살지도 않을 뿐아니라, 집을 다짓고나면 찾아가는 횟수도 줄어든다. 시간이 지남에따라 건축가도 다른 사람처럼 함부로 들어갈수 없다는것을 느끼게된다. 건축가는 그건물의 주인이요 지배자라생각했고, 건물은 그의창작물이요 예술이요 작품이었는데, 일년이년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내가 만든것인데도 조금씩 더이상 내것이 아닌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준공하고 나서 내 것이라고 온전히 주장할수있는 마지막기회는 건축잡지에‘내것’이라고 소개할때이다. 온갖건축잡지는 나의 사상이 녹아있듯이 설명할수있는 절호의 공간이 되는셈이다. 그런탓에 대부분의 건축잡지는 자신의 건축을 물질과 공간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심오한 단어로 가득차있다.
이사실은 건축가에게 건축이란 오히려 공간적작품이기 이전에 시간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시간적이기 위해서는 건물로 포용하고자하는‘인간’이 바라고 있는 바를 읽고번역해야한다. 땅위에 만들어 서게하기까지는 공간적인것처럼 보이던 건축이,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달리보면 사는사람,사용하는 사람과 함께 나타난다. 건축은 시간 속에서 인식되고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건축가가 건축주와함께 집지을 땅을 찾아가는 날이 가장 건축가가 건축가답게보인다고 말한것은, 바로그 때가 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는데도 건축가와 건축주가가장 의기투합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사람은 이제 곧지어질 자기집과 그안에서 벌어질 여러일들을 기대하며 희망을 생각한다. 다른 한 사람 건축가는 앞으로 구체화될 건물의 씨앗을발견한다. 어렴풋이 땅 위에 나타날 건물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치될 이 두 생각을 우리는‘합의(合意)’라 부른다. 바로 이때가 건축가로서의 직능이 가장 분명히 나타날 때이며, 인간과 땅과 집을 동시에 잘이해하기 시작하는 때인것이다.

아마도 주택처럼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운 건물은 없을 것이다. 주택은 사람이 하루종일 사는곳이고, 몇년이고 살며 부대끼는 곳이어서 어디의 무엇도 나의 삶에 가까이 있다. 건물을 보고 걷다가, 하고싶은일을 하다가 나오면 되는 공공건물과는 사뭇다르다. 주택은 그만큼경 제적조건, 기능적인 조건을 넘어서 사는 이의 정신적인 부분, 무의식의 부분 까지 관여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주택은 많은 요구사항으로 시작되어 살아가면서 고쳐지고 계속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일 건축을 주택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던 아주 진부한 모습에 조금더 진실한 건축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한다. 건축은 지어 달라는 사람, 설계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물건으로 구체화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안에는 바람과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있고, 또 그 건물을 사용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건물은 물체의 구성이기 이전에, 그것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어지고 자라다가 마지막에는 언젠가 부수어지고 마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집이 얽히고 설키면서 지어지는 과정에는 인간의‘합의’가 존재한다. 건축에서 보는 인간의‘합의’란 시간의 흐름안에서 이어지는 수많은 인간적가치의 결합이다. 내가 집을 지어 이렇듯 사는 이의 정신적인 부분에까지 관여한다는 것은 살려는 이와 짓고자하는 이가 함께나누는 공동의 기반이 없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주택을 설계한다는 것은 건축주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 스미어 있는 잠재적인 무의식을 발견하여 생활을 물질로 담아내는일이다. 건축의 근거는 그와 내가함께 딛고있는 그무언가의 공동성(共同性)을 발견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가 집이 설 땅에서 생활하고 싶은 바가 어떤 것인지, 그의 기억 속에 숨어 있는 공간적인 질이어떤것인지를 묻고 대답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인간의 공동성(共同性)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일을 둘러싼 건축의 성립과정에 관심이 많다. 아니, 관심이라는범주를 넘어서 이 공동성이야말로 건축을 만드는 힘이요, 건축을 이땅에 존재하게하는 원인이라고 믿고있다.
건축은 인간의 마음을 기술로 번역해 주는 행위이다. 인간의 마음이라고하면 먼저 문학이 떠오르고 예술이 떠오를 것이다.그러나 건축이 인간의 마음을물질과땅위에구체화하는 힘은 문학과 예술을 뛰어넘는다고 믿는다. 기술은 본래 효율을위한것이지만, 건축은이 기술을 통해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라는 바를구체화해 주며, 기술로 사람의 마음을 묶고 장소로 연결시켜준다. 나는 집을 짓고자하는 이와 함께 집이 지어질 땅에설때, 바로 이와같은 공동성을 가장강하게 느낀다. 그 땅위에 어떤 집이 지어질지, 짓고자하는 목적에 잘 맞아줄는지, 어떤 마당에 나가 산책할수 있을지, 친구를 불러 기분좋게 함께 지낼 수는 있을는지, 책을 읽으며 어떤일에 기쁨을 걸것인가를이 집에서 생각할수 있을지, 이 모든 것은 어떤한 사람의가치가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있는 공동의 가치인것이다. 이렇게 공동성은 집속에서 이루어지고 새겨진다.

집을 지을사람과 함께땅을 찾아가는 날은공동성의 씨앗이드러나는 순간이요, 건축가에게는 공동성에 거는 희망을 구체화 할 채비를 하는 순간이다. 땅을 사거나 집을 직접 지어주거나 재료를 사주지도 않는데 내가 건축가로서 이건물의 중심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집이라는 것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살것이며 무엇을 위해 짓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해석하고 공간과 물질로 제안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건축가로서 그집에 공헌하는바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의 마음이라고는 하나 그 자체는 애매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마음은 장소와 공간에 대해서 무언가 분명하게 공동으로 이해하는 힘을 가지고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학교나 도서관을 만들지 않으며, 미술관이나 극장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가 공간과 장소에 대하여 공동의 기반을 갖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장소에서 함께 배우며, 함께 책을 모아두며,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함께 연극을 관람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람이 장소와 공간에 대하여 공동의 기반을 갖고있기 때문에건축이 필요하고 성립할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나는 건축설계를 대단한 미학적 언사나, 건축을 둘러싼 예술의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일에 동감하지 않는다. 또한 건축이 인간의 삶을 윤리적,도덕적으로 교정해주는 문화적행위라고 강조하는 태도에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인간이 건축을 만드는것은 사실이지만, 건축은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만일 건축이 인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근대주의자의 수정된 주장일뿐이다. 오히려 나는 건축을 인간의 희망과 욕망, 주어진 땅의포 용력을‘번역’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고싶다.
번역이란 주어진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번역은 받아 적기도아니며,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도 아니다. 이렇게하여 인간의 희망이 땅위에서 번역됨으로써 땅은 건축과 함께‘사회화’된 풍경을 만들어낸다. ‘공동성(commonness)’이란 말은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공동체(community) ’와는 정반대 지점에 선 것이다. 공동성이란 닫힌 내적 구조를 지향하는 공동체와 달리, ‘사회적’이라는 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에 대한답은 이미 인간과 시간과땅 속에본 질로서 주어져있다. 건축가는 그것을 각종의 기술과 재료로 번역하는 이이다. 나는 이점을 소중하게 여기고싶다.
설계란 2차원적인 도면을 사용하여 3차원의 공간과 형태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그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사람들의 생활이다. 흔히 생활이라하면 기능을 연상하여 다분히 부정정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생활은 시간과 함께 전개하는 일상이고,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행위요, 시간속에서 건물을 동적인것으로 만드는 요인이기도하다. 시간속에서 사람은 움직이고 생활하며, 심지어 건물도 시간 속에서 조금씩 늙기시작한다. 그렇다면 건축물을 설계하는 행위는 인간의 시간을 배열하기위한것이지, 정지된 화면을 아름답게만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건물에서 사람을내쫓을수록 공간은 잠시 아름다워 보일지는 모른다. 그것은 상상하는 것,사고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사는 시간에 대하여 닫아 버리고 마는 행위에지나지않는다.

번역의 본질은‘땅’에서도 얻어진다. ‘아름다운’건축은 독특한 형태를 다루는 건축가의 재능에서 얻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올바른’건축은‘땅’에서얻어진다.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것은 결국 집이 얹히는‘땅’이요, 집을 둘러쌀 하늘이요 나무들이다. 이러한 건축은 땅의 높이와 펼쳐짐 속에 인간이바라는바를비추어낸다. 집을짓기 전에는 건물이라는 형태가, 눈에 띄는 모양이 주인이 될것처럼 보이지만, 지어지고 나면 땅과 하늘과 나무와 공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깨닫게된다. 잘날줄 알았던 건축의 모양은 실제의‘땅’위에서 위약해지고, 반대로 초라해 보일것만 같던 건물이 반대로 조형된‘땅’이라는상황속에서 인간의 실존적희망을 그려내기도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지난 몇년간 지어진집, 지금 의뢰를 받아 앞으로 이렇게 지어졌으면 하고 바라던 집들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를 도와주는사무소의동료들, 스탭들과 함께한것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이룰수 없는 난제를 그들이 풀어주었고, 또 그들이 하기 어려운것은 내가 도우며 집을 지어왔다. 때로는 나의 학생들도 좋은 동료가 되어주었다. 대부분은 가톨릭 교회와 관계가 있는것이라, 벽돌로 지어진것이 많다. 유리도 많이 사용하고 존재감도 사라지도록 투명한 현대건축에 익숙한 눈에는 특이한 이슈를 제시하는 집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점, 특이하고 순간적인 가치가 아니라, 진부하게 보이지만 여전히 물어야하는가치를건물이여전히요구하고있음에주목하고 싶다. 물론 그 진부한 가치가 나 스스로도 긍정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어떤경우에는 내게 설계를 의뢰한 그들이 진부함을 요구하는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진부함을 머리속에 그리고 있다해도,나는 인간이 지키고 싶어 하는 공동성의 다른 측면이라고 이해하고, 관습적인것과는 또달리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이집들을 지으면서‘사람’과‘시간’을 이전보다 많이 생각한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하여야겠다. 그리고‘내가’라고 말할수 없도록 다른 사람의 힘과 생각을 빌려, 아니 공동으로 나누고 이해함으로써 건축은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그 중에서 <성바오로딸 수도회 사도의 모후 집>은 건설도중에 불의의 사고로 설계조직이 와해되었는데도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집이다. 이집은 겉보기에 그저 벽돌로 지어진 네모난 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집은 2 0 0명이 넘는 수녀들이 기도함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는 곳이며, 이집을 완성하는것은 곧 수도자로서의 삶과 생활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집을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건축이란 진정 공동성(共同性)에 기반을 둔 것이며, 모든 사람의 희망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건축적 교훈을 또다시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배움을 고맙게 생각하여나는 이건물의준공을 위한축복 미사에서 이렇게 인사드렸다. “사람은 집을 짓기 시작할 때 모두 기뻐합니다. 그리고 집을 짓고 나서 더욱 기뻐합니다. 집을 설계한 사람이나, 집을 지은 사람이나, 그리고 집에서 살게될 사람이 모두 똑같은 기쁨을 나누게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건축은 단지 돌과 콘크리트로이루어진 구조물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건축을 통해 인간공동의 것을 바라고, 기뻐하며, 함께 사는 희망을 이렇듯 건물 속에담습니다. 이렇게 보면집을짓는다는것은우리가 이루어야 할바, 곧‘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또다른아주 평범한 방식입니다.” 건축은 인간이 시간과 땅위에서 공동성을 실현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사실을 더깊이 이해하고 다른건물로 더욱 구체화 해가고싶다.

글/김광현

건축문화편집부 (archious@archious.com)
건축문화 2005년 4월호 [특집]페이지 © anc건축문화